한국사 연표

한국사 연표 중동 건설 붐

중동 특수, 중동 건설 호황
1973년, 1차 석유파동 직후부터 약 10년간

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 산유국의 호황을 계기로 노동자와 건설사가 중동에 진출했음.
정부는 제도적 지원과 조직 구축으로 건설 수출을 뒷받침했지만,
1980년대 이후 경쟁 심화와 임금 상승 등으로 중동 진출은 점차 감소함.

중동 건설 붐

■ 배경
 ▶ 1950년대부터 건설사들은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산업의 기반을 마련했고, 주한미군 군납 공사에 참여하면서 기술력과 실무 경험을 쌓았음.

 ▶ 공업화 이전, 높은 실업률과 베이비붐 세대의 성장으로 인구 과잉 문제가 사회적 과제로 떠오르자
 ▶ 1962 정부는 이에 대응해 인구 분산과 외화 획득, 국민경제 안정을 목표로 ‘해외이주법’을 제정했고,
 ▶ 1963~ 그 일환으로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함.

□ 해외 건설 시작
 ▶ 1963 삼환기업은 베트남에서 처음으로 해외 공사를 시작했으나,
 - 베트남 전쟁이 계속되던 시기였고 통킹만 사건(1964)까지 발생하면서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으로 보임.
 ▶ 1965 이후 현대건설이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한국의 해외 건설이 본격화되었고,
 ▶ 1966~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환기업 등은 베트남 전쟁 복구사업에 참여하며 실전 경험을 쌓아갔음.

■ 중동 건설 붐
□ 1차 석유파동
 ▶ 1973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해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1차 석유파동이 발생함. 
 ▶ 이로 인해 중동 산유국들은 막대한 수익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호황을 맞이했고, 도로·항만 등 대규모 사회간접자본(인프라) 건설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음. 
 ▶ 이러한 상황은 중동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 수 급증으로 이어졌으며, 한국의 노동자들과 건설사들이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하는 계기가 됨.
 - 1973 특히 삼환기업은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며 한국 기업 최초로 중동 시장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둠.

 ▶ 1974.1 한편, 국내에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경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긴급조치 3호를 시행하며 경제 안정을 모색했음.

□ 중동 진출 확대
 ▶ 1970년대 초반 정부는 한국 기업의 유럽·미국 시장 진출을 장려하며 일정 규모 이상의 수출기업에 해외 지사 설치를 의무화했음.
 - 이에 따라 현대건설, 삼환기업 등 주요 건설사는 중동 공사 관리 및 자재·금융 업무를 위해 런던에 해외 지사를 설치하며 본격적인 중동 시장 대응 체제를 갖춤.

 - 노동자들은 대부분 1년 단위의 비정규직 계약이었지만, 1975년 기준으로 국내보다 3.65배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음. 
 ▶ 그러나 강압적인 노무관리와 차별로 인해 한진 노동자의 KAL 빌딩 방화(1971), 현대조선소 노동자 투쟁(1974), 주베일 산업항 3.13 폭동(1977) 등의 충돌도 발생했음.

□ 정부의 지원
 ▶ 1976.1 정부는 ‘중동경제협력위원회’를 중심으로 실무위원회와 전담반을 갖춘 체계를 마련했으며, 
 ▶ 1976.11 해외건설협회를 설립해 중동 진출 건설사를 지원하고,
 ▶ 1978 노동청 산하 ‘해외근로국’을 통해 파견 노동자와 기업을 종합적으로 관리했음.

□ 중동 진출 감소
 ▶ 1980년대 국내 임금 상승으로 해외 취업의 매력이 줄어들었고, 터키·파키스탄 등 저임금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경쟁이 심해졌으며, 중동 국가들이 자국 업체 우선 정책을 강화하는 등의 이유로 중동 건설시장 진출이 감소하기 시작했음.
 ▶ 이에 따라 중동 건설 노동자 수는 1982년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함.

 ▶ ~1985 현대건설·동아건설·대우건설 등은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총 700억 달러 규모의 공사를 수주하며 외화 획득과 국제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함.

■ 이후
 ▶ 한국 노동자들은 중동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가거나 철수했고, 한국 건설사들도 저임금 외국인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함.




# 참고 자료
고등학교 역사2, 미래엔 2023
[중동 건설 붐] 한국사 연대기, 우리역사넷 2025.6.15